머스크 vs 트럼프: Big Beautiful Bill 논쟁의 진짜 피해자는 누구?
머스크와 트럼프의 갈등은 단순한 정치 스캔들이 아니다. ‘Big Beautiful Bill’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이 싸움은 법과 권력, 자본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대가는 서민이 치르게 된다.

두 억만장자의 결별, 그 시작은 '아름다운' 법안
오늘날 세계 정치는 점점 더 리얼리티 쇼처럼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트럼프와 머스크가 있다. 한 사람은 자본이 곧 기술이라 믿고, 다른 한 사람은 권력이 곧 진실이라 믿는다. 이 두 사람은 한때 뜻을 같이하던 동지였으나, 이제는 서로를 향해 침을 튀기며 싸우는 적이 되었다.
머스크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의 언행은 늘 미래를 말하지만, 정작 그의 싸움은 현재의 세금, 보조금, 그리고 기업 계약을 둘러싼 것이다. 트럼프는 정치라는 무대를 누구보다 쇼처럼 활용하는 사람이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고 강렬하며, 대중의 정서에 박힌 슬로건처럼 작동한다. 머스크와 트럼프의 최근 갈등은 'Big Beautiful Bill'이라는 법안을 둘러싼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아름다운 법안'의 추악한 이면
'Big Beautiful Bill'은 2025년 공화당이 주도한 재정 조정안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세금 감면 연장과 복지 지출 축소, 국방 및 이민 단속 강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이 법안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유산으로 내세우고자 한 핵심 입법안으로, 부자 감세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사회적 약자에게 제공되던 복지 제도를 구조적으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의회예산처(CBO)는 이 법안이 향후 10년간 약 2.4조 달러의 연방 적자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했다. 주된 원인은 트럼프 1기 시절 통과된 감세 정책을 연장하면서 약 3.7조 달러의 세수 감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면 지출은 약 1.3조 달러가량 삭감되는데, 대부분은 메디케이드와 푸드 스탬프 등 복지 관련 항목에서 충당된다. 국방비와 이민 단속, 국토안보 분야는 오히려 예산이 늘었다.
이러한 재정 조정은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재편을 의미한다. 상류층과 대기업에는 감세라는 형태로 혜택이 돌아가고,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에게는 복지 축소라는 형태로 부담이 전가된다. 결과적으로 이 법안은 계층 간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며, 단기적인 정치적 성과를 위해 장기적인 사회적 비용을 외면한 채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머스크는 이 법안을 '역겹다'고 표현하며, 미국을 파산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머스크가 전기차 보조금 축소에 분노한 것이라며 이를 일축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머스크는 자신의 기업 이익을 지키기 위해,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해석에는 큰 이견이 없다. 문제는 둘 다 '서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만, 그들의 싸움 속 어디에서도 서민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권력 게임
우리가 이 싸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법률과 제도의 언어를 통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장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순간에도 거대 자본과 정치 권력은 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포장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Big Beautiful Bill'은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그 안에 담긴 조항들은 추악하고 불균형하다. 이는 법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내용이 정의롭지 못할 경우 법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하고 있다. 미국 헌법에도 유사한 정신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스크와 트럼프의 논쟁 속에서 그 '인간다운 삶'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어쩌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복지 축소와 세금 감면의 조합은 특정 계층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며, 그 반대편에는 절박하게 살아가는 다수의 얼굴들이 존재한다.
연극이 끝난 후, 조용히 무너지는 삶들
이 싸움은 결국 부자들끼리 벌이는 감정의 대결이다. 문제는 그 감정의 파편이 미국의 서민은 물론, 전 세계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식료품비를 줄여야 하고, 누군가는 치료를 포기해야 하며, 누군가는 학자금 대출 상환을 미뤄야 한다. 머스크가 전기차 보조금을 잃든, 트럼프가 입법적 승리를 놓치든, 그들은 여전히 억만장자로 남는다. 그러나 법안 하나가 통과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세계 시민은 가난해지거나, 병들거나, 조용히 고립될 수 있다.
법은 본래 공정해야 하고, 정치인은 국민을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 반대를 보여준다. 두 사람은 서민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논의하는 모든 조항은 서민을 배제한 채 결정된다. 그들에게 서민은 여론조사 수치이며, 선거 전략상의 변수일 뿐이다. 실제로 누구의 전기세가 오르는지, 누가 약값 때문에 울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이것은 결국 한 편의 연극이다. 대중은 관객이며, 언론은 조명이고, 법안은 무대 장치이다. 주인공은 머스크와 트럼프이지만, 우리는 관객이 아닌 희생양이다. 이 연극이 끝날 때쯤, 우리는 다시 한 번 무대 뒤에서 쓰러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곧 가라앉거나, 가라앉힘을 당한 채 다음 선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싸움을 단순한 뉴스로 소비해서는 안된다. 머스크와 트럼프의 말싸움 이면에는 법의 정의와 정치의 도덕성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현실 속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제는 관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대 위의 조명을 바꾸고, 대본을 다시 쓰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 연극은 비로소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21대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써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