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능력주의의 불편한 진실: 우리는 과연 공정한가
대한민국 교육의 구조를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접합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교육이 어떻게 계층 재생산의 도구로 기능하며 공정과 노력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능력주의, 교육, 그리고 구조의 얼굴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며, 구조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속죄다. 우리는 아침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풍경 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상기하지만, 그 아이들이 향하는 공간은 계급과 기회의 경계선이 가시처럼 솟아 있는 전장에 가깝다.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사유화된 신념체계
“노력하면 된다.”
이 말은 오래전부터 우리 교육의 기본 문장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문장은 단순한 도덕 구호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구조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우리가 능력주의라고 부르는 담론은 단지 성취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장치이다. 실제로는 출발선이 다르며, 준비 자원이 다르고, 심지어 해석되는 실패의 의미조차 다른 현실 속에서, 능력주의는 불공정의 구조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접합: 경제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연합
교육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지 그 연결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와 접합하는 형태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의 고등교육은 더 이상 단순히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계층 상승의 유일한 경로로 기능하며, 그 구조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그 언어가 바로 ‘능력’, ‘열정’, ‘자기 계발’이다.
이들 개념은 자기 자신의 실패마저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즉, 노력하지 않아서 떨어졌고,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아서 뒤처졌으며, 자기계발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탈락했다는 내면화된 구조. 이렇게 교육은 단지 상부구조가 아니라, 상부구조의 구성적 핵심으로 전치된 권력의 공간이다.
학교는 국가의 얼굴이다
학교는 단지 교육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시민에게 요구하는 이상적 인간형을 길러내는 훈육의 장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경쟁을 배우고, 성적을 통해 서열화되며, 타인의 실패를 나의 우월로 착각하는 법을 익힌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정체성은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노동자상과 정확히 겹친다.
하지만 정작 이 시스템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구조가 아닌 자기 탓으로 돌리도록 훈련받는다. 이처럼 교육은 자본주의 구조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를 ‘공정’과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내면화시키는 기제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어디서부터 다시 써야 하는가
우리는 종종 교육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입시 제도만을 바꾸려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제도에 있지 않다. 담론에 있다. ‘능력주의’라는 관념,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하는 경쟁과 배제의 윤리, 이 모든 것이 구조적 불평등(공정과 노력의 획일화)과 접합되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기에 교육을 바꾸기 위해서는 서사 자체를 다시 써야 한다. 공정이란 단순히 시험 점수로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출발선이 다르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나 기회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공정이란 모두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비슷한 조건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조정하고 여건을 맞춰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력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가족의 지원을 받으며 노력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일하거나 가족을 돌보며 시간을 쪼개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더 노력했는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따라서 노력은 개인의 태도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을 사회가 제공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결국, 교육에 있어서 공정과 노력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고 조정해야 하는 구조의 문제이다. 그럴 때 비로소 교육은 이데올로기의 감옥이 아니라 해방의 문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