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세력은 아고니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아곤'에서 시작된 아고니즘은 현대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규칙을 파괴하려는 '내란에 기생한 족속들'에게도 과연 아고니즘적 대화가 가능할까? 샹탈 무페의 아고니즘 이론과 한국 사회의 현실을 통해 민주주의의 진정한 경계를 탐색한다.

내란 세력은 아고니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아고니즘이란 무엇인가

아고니즘은 정치 철학에서 대립 또는 경쟁의 불가피성과 긍정적 역할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단순히 모든 갈등이 해소된 합의의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경쟁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 아고니즘의 핵심은 적대(Enmity)와 대립(Agonism)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적대는 상대를 완전히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여 민주적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반면 대립은 '대항자(adversary)'로 인정한다. 즉, 나와 다른 가치관과 입장을 가졌지만, 동일한 헌법적 질서와 민주적 규칙 안에서 공존하며 경쟁해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대항자들은 민주주의라는 경기장에서 같은 규칙을 따르며 자신의 입장을 정당하게 주장하고, 서로에게 비판을 가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겨룬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민주주의는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하며 활력을 얻는다. 합의 없는 동의라는 표현처럼, 서로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민주적 절차와 경쟁 방식에는 동의한다는 전제가 아고니즘의 뿌리를 이룬다.

아고니즘의 기원과 유래

아고니즘이라는 용어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어 아곤(ἀγών, agōn)에서 유래했으며 이 단어는 경쟁, 투쟁, 경기, 논쟁 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아곤은 단순히 승패를 가리는 것을 넘어 경쟁 자체의 중요성과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탁월함을 강조하는 문화적 현상이었다. 올림픽과 같은 운동 경기, 비극 경연, 정치적 토론 등 다양한 형태의 아곤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경쟁은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경쟁을 통해 발전하고, 갈등을 통해 더 나은 것을 찾아가는 정신이 고대 그리스의 아곤에 내재되어 있었다.

현대 정치 이론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아고니즘 개념을 정립하고 확산시킨 주된 인물은 벨기에의 정치 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다. 무페는 20세기 후반,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며 합의와 이성적 토론만을 강조하는 심의 민주주의 모델의 한계를 비판하고 아고니즘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샹탈 무페는 누구인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1943년생의 벨기에 출신 정치 철학자로,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무페는 특히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해석했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에서 오랜 기간 교수로 재직했으며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 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함께 작업하며《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1985)과 같은 중요한 저서를 통해 아고니즘 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무페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 기존의 자유 민주주의가 간과하는 권력 관계와 사회적 적대성을 인정하고, 이를 민주적 방식으로 다루는 급진적인 형태의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 탈정치화 비판: 합의와 타협만을 강조하는 주류 정치가 사회 내의 실제적 갈등과 대립을 억압하고, 이는 결국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이나 극단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한다.
  • 아고니즘적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적대가 아니라 대립이 존재하는 공간이며, 이러한 대립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와 헤게모니가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민주적 활력을 위한 원동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페는 현대 정치의 복잡성과 다원성을 인정하며,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재협상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과정임을 강조하는 사상가이다.

불법과 거짓, 억지와 남탓하는 상대도 아고니즘을 적용해야 하는가?

아고니즘은 불법이나 거짓, 억지, 남탓에 기반한 상대에게는 적용되기 어렵거나, 최소한 아고니즘적 대립의 범주를 벗어난다. 아고니즘은 상대를 대항자로 인정하고, 동일한 민주적 규칙과 헌법적 질서 안에서 경쟁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동일한 규칙과 민주적 질서라는 전제다.

  • 불법 행위: 아고니즘은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는 틀 안에서의 대립이다. 상대방이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면 이는 아고니즘적 대립의 기본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민주적 대립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신뢰와 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고니즘적 대립보다는 법적 제재나 강제력이 필요한 영역으로 전환된다.
  • 거짓과 억지: 아고니즘은 상대방의 주장이 나름의 합리성과 진실성을 추구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 비록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다른 관점으로서 민주적 토론의 장에 참여할 자격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상대가 명백한 거짓을 주장하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억지를 부린다면, 이는 사실에 기반한 건전한 대립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 남탓: 남탓만 하며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는 태도 역시 건설적인 대립을 방해한다. 아고니즘은 서로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입장을 책임 있게 옹호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러한 성숙한 태도가 없는 한 생산적인 아고니즘적 대립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들은 아고니즘의 전제를 훼손하므로, 아고니즘의 영역 밖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이다.

내란 세력에게 아고니즘을 적용해야 하는가

윤석열 내란 음모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아고니즘의 개념을 적용하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불법계엄을 선포하고 내란을 시도하다가 파면된 윤석열 내란수괴와 그를 지지하고 내란을 옹호하며, 심지어 윤석열 파면 이후에도 사과하지 않는 국민의힘은 아고니즘적 대립이 성립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파괴한 세력이다.

  • 헌법적 질서의 파괴 행위: 불법 계엄 선포와 내란 시도는 대한민국 헌법과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중대한 범죄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를 넘어 국가의 근본 질서를 흔들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행위에 연루되거나 이를 옹호하고 사과조차 없었다는 행위는 아고니즘이 상정하는 규칙 안에서의 경쟁을 넘어선다. 규칙 자체를 부정하고 폭력으로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정치적 '대항자'의 영역이 아니다.
  • 대항자 아닌 적으로의 전환: 아고니즘에서 대항자는 비록 생각이 다를지라도 민주적 공존이 가능한 상대이다. 그러나 내란이라는 중대 범죄에 동조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민주적 대화와 타협의 의지가 없으며, 오히려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를 민주주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적(enemy)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 존중과 규칙의 존중 부재: 불법 계엄, 내란 시도, 파면, 사과 없음 등은 법적, 사실적 판단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행위와 태도는 존중을 무시하고 민주주의의 기본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최소한의 사실 관계에 대한 동의와 민주적 규칙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데, 여전히 내란을 옹호하는 무리와는 건전한 공론이나 아고니즘적 대립이 성립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사라진다.

따라서, 국민의힘은 아고니즘이 상정하는 대항자로서 자격이 없다. 아고니즘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의견과 이념이 겨루는 장을 제공하지만 그 장의 기반이 되는 헌법적 가치와 민주적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세력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적 논의를 넘어선 사법적 판단과 민주주의의 방어적 기능이 작동해야 할 시점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적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